파란 체크무늬의 기억

퀘벡 몬트리올에서의 중학생 시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파란 체크무늬 교복이다.

내 어린 시절의 무대였던 Villa Maria 학교는, 마치 고풍스러운 프랑스 소설의 한 장면 같았다.

지어진 지 200년이 넘은 팔라디오 양식의 회색 돌 본관은

겨울의 날카로운 햇살 아래 은은하게 빛났고,

그 뒤편에 자리 잡은 신축 건물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서 있었다.

두 건물을 이어주는 통로를 매일 지나칠 때마다,

나는 마치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문을 통과하는 기분이 들었다.

1854년에 설립된 이 가톨릭 여자 사립학교(현재는 남녀공학)는,

퀘벡의 교육 시스템에 따라 중학교와 고등학교 2학년까지가 통합된 Secondaire였다.

Villa Maria에 처음 발을 들인 날,

나는 내가 이곳에서 어떻게 자리 잡을 수 있을지 막막했다.

프랑스어는 여전히 내게 이질적이었고,

나는 그 언어의 유려한 곡선에 억지로 맞춰지는 조각 같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나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 준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나의 1, 2학년 담임 선생님, 모두가 Madame Nanini라고 부르던 분이었다.

프랑스어 선생님이자 연극부 지도교사였던 그녀는,

작고 단단한 체구에 매달 바뀌는 다양한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인 분이었다.

그녀는 교실을 가득 채우는 묘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녀의 꼿꼿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것이다.

파리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마치고 고향 몬트리올로 돌아온 그녀는,

마치 프랑스어라는 언어를 의인화한 사람 같았다.

지조 있고 고고하면서도,

언제든 유쾌하고 날카롭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여성.

그 강단과 생동감이 더해져,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긴장감을 유지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하나의 완벽한 악기 같았고,

파란 체크무늬 치마를 입은 학생들은 마치 그녀의 손끝에서 조율되는 음표 같았다.

Madame Nanini와 함께 2년간 연극 수업을 들으며,

나는 1학년 학기 초반부터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늘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웠고,

실수로 드러날 내 언어적 서툼이 자꾸만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작은 실수에도 내 목소리는 금세 움츠러들어 동굴 속으로 숨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런 나를, Madame Nanini는 무대 앞으로 밀어냈다.

“네 머리와 심장에 있는 그것을 그저 내뱉어버리면 돼, Jaehee.”

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무대 위에서도 네 고유의 목소리로 공간을 채워봐.”

그녀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고 추상적으로 들렸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얼마 후, 그녀는 반 학생들에게 몇 개월간 준비를 해서

피에르 드 마리보(Pierre de Marivaux)의 희곡

<사랑과 우연의 장난 (Le Jeu de l'amour et du hasard)>으로 교내 공연을 하자고 했다.

이 작품은 18세기 낭만주의 시대 프랑스 사회의 계층 구분과,

그 안에서의 연애를 유머와 재치로 풀어낸 이야기였다.

하인과 주인이 신분을 바꿔 각자가 좋아하는 상대의 진심을 시험하는 과정을 통해,

사랑이 어떻게 발현되고, 권력과 계층이 어떻게 얽히는지 풀어내고 있었다.

이 묘한 사랑이야기에 푹 빠져 대본을 읽어 내려가면서,

어째서인지 잘생긴 남자 주인공 도랑트(Dorant)의 역할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심이 들었다.

'고전 프랑스어로 된 대사를, 그것도 책 한 권 분량을 내가 주인공으로 맡을 수 있을까?'

그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기도 전에,

Madame Nanini는 캐스팅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각 주인공에게 두 명의 배우가 선정되어 1부와 2부를 맡게 될 것이라고 했다.

“먼저 하고 싶은 역할이 있는 사람은 손 들어보자!”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예쁜 여자 주인공을 맡겠다는 학생들이 우르르 손을 들었고,

도랑트를 맡고 싶다는 학생도 한 명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아,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저!! 저도…! 도랑트 하고 싶어요!"

그렇게 얼떨결에 도랑트2 역할을 맡게 되었고,

나는 몇 개월간 도랑트 그 자체가 되기 위해 모든 신경을 쏟아부었다.

프랑스인의 감성을 머리와 심장에 채우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내뱉게 하기 위해

Madame Nanini는 연기에 도움이 될 만한 문학작품, 영화, 음악들을 추천해 주었고,

그때부터 나는 진정으로 그들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기 시작했다.

대사를 외우고,

강약을 주어야 할 부분, 감정을 표현해야 할 부분을

빼곡히 적어놓은 대본은 어느새 너덜너덜해졌다.

그 즈음, Madame Nanini는 공연복으로 갈아입고 무대에서 연습을 시작하자고 했다.

첫 연습 무대에서 대사를 말하는 순간,

나는 언어가 나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를 통해 내 세계가 확장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무대 위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고,

그 순간만큼은 내 불완전함조차 나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Madame Nanini는 단순히 연극이나 언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나에게 언어의 힘을 가르쳐주었고,

그것이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되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어느날 Madame Nanini는 프랑스어 수업 학생들에게

벨기에에서 열리는 글쓰기 경연대회에 제출할 글을 쓰게 하셨다.

도랑트에 대한 자신감도 붙고, 불어실력도 술술 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 기세를 몰아, 상당히 거창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던 나는(?), 제출 일주일 전까지도,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몰라 내용을 몇 번이고 고쳐썼다.

그때, 그녀는 내 글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

“Jaehee, 힘을 빼. 네 언어를 찾아야 해.

네 목소리 말이야.

그게 한국어든 프랑스어든,

아니면 그 둘의 중간 어디쯤이든 말이야.”

그때는 그저 내가 잘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를 쓰라는 정도로 알아들었지만

나중에 성인이 되고, 어느 날,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며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이 그의 우상 마틴 스콜세지 앞에서 이 말을 했을 때,

난 그제서야 그녀의 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말은 마치 예언처럼 다가왔다.

나는 아직도 내 목소리를 찾아가는 중이다.

그것은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Villa Maria의 복도를 걸을 때마다,

나는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래된 돌 건물과 현대적인 신축 건물이 이어지는 그 통로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경계 같았다.

그 경계를 걸을 때마다,

내 안에서도 과거와 현재가 충돌했다.

떠나온 한국과,

지금 서 있는 몬트리올.

그 두 세계가 내 안에서 부딪히며

하나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지금도 몬트리올의 겨울을 떠올리면,

Villa Maria의 고풍스러운 건물,

파란 체크무늬 교복,

그리고 Madame Nanini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녀가 내게 심어준 언어와 삶의 감각은,

내가 평생 간직할 나만의 빛이다.

그 빛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기억하게 해주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작은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Previous
Previous

이윽고, 마음으로 보는 세계